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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학회 소식

[인터뷰] 한국역학회 기획 인터뷰(2) 김정순 교수와의 대화

  • 작성자한국역학회
  • 작성일2019-05-29
  • 조회수179

[인터뷰] 한국역학회 기획 인터뷰(2) 김정순 교수와의 대화

 

<!--?xml:namespace prefix = o /-->20171222일 경기도 광주 귀여리 사저-김정순교수님 인터뷰 

대담자: 천병철(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사진: 손상호(고려대학교의과대학)

글.편집: 최영주(한국역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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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Removed Tag Filtered (o:p) --> 

< 프롤로그 >

김정순 교수님은 한국역학회를 만들고 초대부터 3대까지 회장을 하셨을 뿐 아니라, 사실상 오늘날 우리나라의 역학이 있게 한 장본인이다. 당시 우리나라 보건학의 발달이 아직 미약하던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역학에서 무엇을 연구하고 가르쳐야 하는가를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 보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문으로서의 역학과 보건인으로서 그 실천을 강조하는 가르침을 30년이상 펼치면서, 오늘날 보건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 기라성 같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셨다. , 무엇보다도 남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많은 역학 문제의 해결과 미지의 질병 유행 조사 등에서 다른 사람들은 따라올 수없는 많은 탁월한 업적들을 남기어 우리나라 역학 학문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김정순 교수의 퇴임이 거의 20년이 되가는 현 시점은 물론, 앞으로도 상당기간 우리나라 역학사에서 이만한 족적을 남기는 분은 나오기 힘들 것이다.<!-- Removed Tag Filtered (o:p) --> 


이처럼 한국 역학의 대모이자 역학의 거인이신 김정순교수님을 인터뷰하여 후학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큰 책임감이 느껴졌다. 지금 역학을 공부하는 세대는 김정순 교수님을 책이나 논문으로 접하거나 간접적으로 들어서 성함을 알고 있겠지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세대가 아니다. 김정순 교수님의 역학 철학과 가르침을 한 번의 인터뷰를 통해서 끌어내어 후학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무거웠으나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교수님 댁을 방문한다는 즐거움도 컸다. <!-- Removed Tag Filtered (o:p) --> 


인터뷰가 진행된 20171222일은 공교롭게도 동짓날이었다. 오전 10시에 한국역학회지의 최영주 선생, 손상호 전공의와 같이 김정순 교수님 댁에 도착하여 시작된 인터뷰는 원래 12시에 마칠 예정이었다. 그러나 12시에 맞춰 도착한 정해관, 신주영 교수,역학회 정슬비 선생과 같이 교수님이 직접 끓여주신 팥죽을 먹고 그 후에도 계속 진행된 인터뷰는 결국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내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김정순 교수님께서는 질문 하나하나에 당신의 경험과 생각과 철학을 쏟아내셨다. 생각 같아서는 김정순 교수님 말씀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주석을 달아가며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나 한 번의 인터뷰로 다 들여다볼 수없는 거목의 긴 역사를 우선 여기에 정리하였다. <천병철. 고려의대 교수><!--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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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많은 여고생의 당찬 결의”<!-- Removed Tag Filtered (o:p) --> 


-  교수님, 일관되게 평생을 살아오신 교수님을 뵙고 있으면, 그 맨 처음 시작이 궁금합니다. 그 당시 어떻게 의학을 전공하고 의과대학에 가실 생각을 하셨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Removed Tag Filtered (o:p) -->  

내가 의과대학에 가게 된 것은 심훈의 <상록수>가 굉장히 큰 영향을 줬어요. 6.25 동란 때 피난 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부산 광복동 네거리에 피난 온 연합대학이 있었어요. 그 맞은편에는 헌 리어카 책방이 있어서 여기서 학창시절에 많은 책을 빌려다 읽었어요. 그러다 심훈의 <상록수>를 만난 거예요. 그전까지만 해도 난 그냥 공부만 잘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상록수>를 읽고 나니 사회를 보는 나의 시각이 달라지더라고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리 못살고 일본에게 식민지배나 당하나 이런 생각이 드는거에요.나는 어려서 일제 치하에 국민학교를 다녔으니 당시까지 국가관이나 이런 것이 없었다가 <상록수>를 읽고 눈을 뜬거에요.<!-- Removed Tag Filtered (o:p) --> 

 여고시절 친했던 친구 둘과 같이 셋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드나 토론을 하다가 맘이 딱 맞았어요. ‘우리라도 어떻게 해보자. 그러려면 교육이 필요해. 학교에서 하는 공교육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올바른 철학을 가진, 인격 형성에 필요한 교육을 제대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시켜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라가 잘 살수 있어. 그래서 어머니가 될 여성 교육이 생활비 벌어 오는 남자들보다 더 많이 필요해. 현재처럼 딸은 교육도 뒷전인, 여성을 비하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목적을 달성키 어려우니 법적 사회적 뒷받침을 해 줄 정치가도 필요해. 여성이 정치도 해야 정책도 바뀔 수 있겠지. 그리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촌에서는 아픈 사람들을 고치고 돌봐 주는 의사가 필요해. 당장 아파서 죽어가도 병원에도 못 가고 있잖아.그래서 여고생 셋이서 너는 교육을 맡아라, 그리고 너는 정치를 맡아라, 너는 의학을 맡아라’ 하고 당찬 결의를 했어요. 그 때 나는 시골가서 아파도 병원에도 못가고 고생하는사람들을 돌보는 의사가 되겠다.이렇게 정했죠. 내가 그런 미션 (mission)을 맡아서 의대를 간 거에요. 당시 교육을 맡았던 친구는 사범대학 교육철학과를 전공하고 미국에가서 교육학을 더 공부한 후 교민이 많은 뉴욕에서 한국 역사 및 문화에 관한 교육을 했죠.그리고 정치 하는 친구는 정치학과를 가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나중에 여성문제 연구소에서 이희호 전직 대통령 영부인 등 여성학 전문가들과 함께 영세지역 여성들의 계몽과 복지사업에 전력을 기울였어요. 이 친구는 아쉽게 대장암으로 50세도 되기 전에 돌아갔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꿈 많은 여고생 세명의 당찬 결의가 목적 달성에는 미치지 못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실천에 옮기려 진력한 셈이지요.”<!--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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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생활; 3만 명을 치료하는 의사가 될 것인가, 4천만 명을 돌보는 의사가 될 것인가”<!--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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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은 의대 졸업 후 미국으로 가셔서 처음에는 임상을 전공 하셨는데, 그 동기나 과정이 궁금합니다. 당시 미국 생활은 어떠셨는지요?<!-- Removed Tag Filtered (o:p) --> 

 “무의촌에서 봉사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것은 의과대학 내내 변함이 없었어요. 당시 UNSA라고 있었어요. UN Student Association이라고 한국에 있는 대학생들을 모아서 농촌 계몽운동처럼 나가는 건데 아마도 대학생들의 국민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자는 의의 였던 것 같아요. 이 때 의대생들은 의료봉사하고 위생 문제도 상담하고 했죠. 내가 2학년 때 강원도 화천으로 봉사를 갔습니다. 나는기생충 및 개인의 위생 관리문제 담당자로 같이 갔어요. 저녁에 주민 대표자들과 좌담회를 하는데, 나는 아직도 그게 안 잊혀져요. 당시 이장이 좌담회에 와서 여러분들이 학생 신분으로 봉사하러 여기를 왔는데 이곳은 정말 문제가 많다. 아파서 죽겠는데도 병원을 갈 수가 없다. 돈도 없고 엄동설한에 멀어서 갈 수도 없어 그대로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학생들 중에 졸업해서 여기 오겠다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 보세요.그러는데 아무도 대답을 못했어요. 그때 나는 '아! 이게 현실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상록수>에서 주인공이 폐결핵에 걸리고 동리 사람들이 급성병으로 의사는 구경도 못하고 죽어야만 했다던, 소설 속 얘기로만 알고 있던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었지요. 이 질문은 아직도 가슴을 찌릅니다. 이때가 1958년도에요.<!-- Removed Tag Filtered (o:p) --> 

<!-- Removed Tag Filtered (o:p) --> 사실 미국도 그래서 간 거에요. '도움을 주려면 먼저 최고의 의술을 배워야 겠다.' 해서 졸업 전 의사 면허시험도 보기 전에 ECFMG 시험 (편집자 주: 미국의사자격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어요. 최고의 의술을 배울 것을 기대하면서 미국 스웨디시(Swedish) 병원에서 인턴생활을 하는데, 모두 개원의들의 환자들이어서 환자 진료는 시키지 않고 병력 청취와 혈압 측정, 이학적 진찰 결과의 기록 등 기계적인 일만 계속시켜서 처음에는 후회가 되더라구요. 최고의 트레이닝을 위해서 서울대병원 인턴도 뿌리치고 왔는데, 고작 이런 일만 시키다니. 거기에다 백인 의사 중심의 차별도 있었어요. 내가 그 병원에서는 베스트 인턴이었는데도 병원을 옮기기 위해서 여러 대학병원에 지원했는데 한 군데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마침 덴버시립병원에서 레지던트 모집 광고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옳다구나 하고 지원을 했어요. 내과 First resident. 그랬더니 됐어요. 덴버시립병원은 콜로라도 의과대학에서 자기학교 학생 실습과 졸업생들 교육과 훈련에 활용하는, 우리나라로 보면 서울 시립보라매병원 같은 곳이에요. 여기서는 신나게 환자를 보면서 배웠습니다. 1년 차한테 한 병동을 통째로 맡기더라구요. 내가 그 병동 전체의 주치의가 되어 대학에서 파견된 전문과 교수의 지도하에 입원에서부터 진단, 치료, 퇴원, 퇴원 후 외래에서의 지속적 관리 등을 다 하는거에요. 거기서 굉장히 많이 배웠어요. 그런데 그 병원근무 의사의 대부분은 미국 의대 출신이었고, 동양의 작은 나라, 특히 한국 동란 때 참전을 통해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라고 각인 된 한국에서 온 나에게 니가 알면 얼마나 알겠냐는 식의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었어요. 자존심이 아주 상했죠. 그러다 두 번의 반전의 기회가 있었어요.<!-- Removed Tag Filtered (o:p) --> 

<!-- Removed Tag Filtered (o:p) --> 한 번은 모든 관련 교수들과 전임 의사들 앞에서 CPC 프레젠테이션 (편집자 주: clinicopathologic conference의 약어로 병원에서 여러 관련 과 전문가들이 모여서 한 환자의 자료, 진단, 감별 진단, 치료 계획 등을 논의하는 것) 할 때, 난 외국인이니까 준비를 많이 했죠. 발표 할 것을 타이핑 치고 나서 비서한테 발음할 때 액센트를 어디다 두면 되는지 일일이 물어 가면서까지 연습을 했어요.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내 수련 담당교수가 끝나고 나서 많은 참가자들 앞에서 너 아주 스마트 하다. 엑셀런트한 프레젠테이션이다하고는 나와 같이 자기 환례를 발표한 동료 레지던트에게는 네이티브스피커이면서도 왜 닥터 김만큼 못하냐. 본받아라하셨어요. 차별 중 보상을 받은거죠.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50대 여성 신환이 왔는데 어떤 병동으로 넣을지 병력청취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미국 의사가 이미 그 환자 병력청취를 해서 히스테리성 반응으로 진단을 했었나 봐요. 난 그걸 모르고 새로운 환자니까 나대로 진찰을 했는데 내가 보니 이건 정신과 문제가 아니라 기질성 질환 같더라구요. 그래서 뇌출혈 아닐까 해서 척수천자로 확인을 했는데 정말 뇌출혈이었어요. 그래서 그 환자는 바로 수술을 했어요. 그때 미국 교수들에게 또 한번 점수를 땄죠, 하하.”<!-- Removed Tag Filtered (o:p) --> 


-  그렇지만 교수님은 임상을 계속 하시지 않고 보건학과 역학으로 들어서게 되셨는데요…<!-- Removed Tag Filtered (o:p) --> 

<!-- Removed Tag Filtered (o:p) -->"하루 하루 병원 생활을 하고 있는 중 의과대학에서 미생물을 가르치는 여교수와 알게되어 자주 점심을 함께하곤 했어요. 그런데 한 번은 나한테 너는 뭘 하려고 이렇게 미국에서 힘들게 공부를 하냐? 이거 마치고 뭐 할거냐?’ 묻더라구요. 외국 의사들 대부분은 미국에 이민해서 정착하려고 애쓰거든요. 그래서 질문했던 것 같아요. 뭐 좀 도와줄 일이라도 있나 해서요. ‘우리나라보다 발전된 너희 나라 의술을 배우러 왔다. 나는 수련 끝나면 한국의 의사 없는 무의촌에 가서 일 할 거다.그랬더니 이 친구 눈을 크게 뜨면서 농촌 같은 지역사회에서 일을 하려면 public health (공중보건)를 해야지 내과만 알아서는 큰 도움이 안된다.고 진심으로 어드바이스를 해주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친구는 제대로 뭘 아는 사람이었어요. 진짜 내과만 알아서 뭐가 되겠어요?<!-- Removed Tag Filtered (o:p) --> 

 그래서 이 친구 말대로 공중보건을 공부 하려고 존스홉킨스랑 여러 보건대학원에 지원서를 냈는데 다 합격을 했어요. 아마도 내 의대 성적, ECFMG성적, 그리고 병원 담당교수의 추천서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 중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이 명성도 있고 동부라서 제일 괜찮아서 거기를 가게 된거에요. 당시 미국에는 사람은 동부로, 동물은 서부로라는 말도 있었어요. 근데 선택을 잘했는지,인연이 잘 맞았는지 내가 존스홉킨스를 가면서부터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존스홉킨스의 MPH과정 (편집자 주: master of public health, 보건학석사) 1년과정이며 이를 4분하여 quarter 제로 되어 있는데 1 quarter를 마칠 때쯤에 지도교수가 나를 부르더니 학교에서 장학금 (tuition scholarship)을 준다고 했어요. 등록금이 비싸서 힘든데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리고 나는 MPH 과정을 끝내고 다시 내과 트레이닝을 계속 이어가려고 했는데, 졸업이 가까워진 무렵 교무처장을 맡고 계셨던 보건행정 교수가 나를 교무처에서 보자고 하여 갔더니 너는 이거 끝나고 뭐 할꺼냐?’ 해서 나는 미국에서 최고의 의술을 배워서 한국의 무의촌 가서 봉사 하려고 한다.’ 했더니참 좋은 아이디어다. 너희 나라는 아직 가난하고 지역사회를 위한 보건의료 개념이나 체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모자라는데 너 같은 인력이 많이 필요할 거다. 그런데 너 같은 인재가 지역사회에 나가서 밤새고 진료해도 1년에 많아야 3만 명 이상은 못 품어 준다. 너네 국민이 4천만 명이라는데 겨우 3만 명의 병을 고쳐주고 네 꿈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겠냐?’ 하시는 거예요. ‘너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교육하고 훈련 시켜서 숫자를 늘려야 한다. 개인적인 봉사가 아니라 국가 전체 차원으로 접근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너 여기서 박사학위를 하고 한국으로 가라. 그래서 너 같은 인재의 수를 늘려라. 그래야 네 꿈을 이룰 수 있다.그러는 거에요. 이게 정말 중요해요. 미국의 이런 시스템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때 느꼈어요. 이렇게 남의 나라 사정까지 꿰뚫어보고 도와주려는 그 성의가 큰 나라다웠어요. 몇일 있으면 박사 학위 시험이 있으니까 보라고 해서 봤더니 또 됐어요. 이번에는 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는데, 등록금과 연구비 전액을 제공하고 stipend로 월250불씩 생활비까지 줬어요. 당시 내가 인턴과 레지던트로 삼일에 한 번씩 밤새워가며 애 태우며 환자 돌봐주고 받은 월급이 150불이었어요. 겨우 잠자는 숙소만 제공하고 세끼 병원 식당에서 사 먹어야 겨우 살 수 있는 정도였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공부 하면서 월 250불의 거금을 받았다는 것은 지금도 황홀해요. 정말 운이 좋았어요.

 내가 존스홉킨스에서 공부할 때는 다른 과목들도 재미있었지만 pathobiology (병태생물학)population ecology (인구생태학)처럼 필드 (field)에서 직접 관찰하고 연구하는 과목들을 좋아했고 특히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나요. 존스홉킨스에서 비로소 시야가 넓어지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내과 임상을 한 것도 중요한 경험이고, 역학을 하려면 임상지식도 아주 중요해요.<!-- Removed Tag Filtered (o:p) --> 

<!-- Removed Tag Filtered (o:p) --> 존스홉킨스에서 박사학위를 마쳐갈 때 김인달 교수님으로부터 서울대 보건대학원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고, 결국 1967년 서울대 보건대학원으로 오게 되었지요.”<!--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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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moved Tag Filtered (o:p) -->내가 생각하는 역학이라는 학문”<!-- Removed Tag Filtered (o:p) --> 

-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역학이라는 학문은 어땠나요? 그리고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역학은 어떤 것인지요<!-- Removed Tag Filtered (o:p) -->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역학은 너무 뒤죽박죽이었어요. 미국에서는 의대생들이 역학을 배우는 예방의학 과목이 중요하니까 비중이 늘어났거든요. 당시 우리나라도 미국을 따라서 예방의학의 학점을 2학점에서 4, 5학점으로 늘렸어요. 그런데 왜 의과대학에서 예방의학이 필요한가그것만 제대로 알았더라도 일본에서 가르치던 위생학을 그대로 가르치진 않았을 거예요. 처음에 한국에 와서 보니까 역학은 없고 감염병관리, 결핵관리, 나병관리, 기생충관리 같은 과목들만 있었어요. 감염병관리는 그래도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교수가 쓴 감염병관리 매뉴얼을 역학 교재로 쓰고 있어 교육 내용이 충실했는데 다른 관리과목들은 한국에서 담당하고 있는 기관의 장을 모시거나 실무자의 경험담이 많았고, 아니면 의과대학 교수들께서 강의해 주셨지요. 내가 역학회를 만들자 마자 전국의 역학관련 교수나 교육담당 선생님들을 모셔서 우리나라 역학에서 교육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표준화하는 작업부터 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요.<!-- Removed Tag Filtered (o:p) --> 

나도 존스홉킨스에서 역학을 배웠지만 실제로는 역학이란 학문과 철학을 이해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못된 것 같아요. 오히려 역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스스로 다시 역학을 공부한 부분이 더 커요. (역학을)가르치면서 대체 역학이라는 건 뭔가? 우리 학생들이, 특히 보건사업을 하면서 국민들의 건강을 책임질 보건 전문가들이 알아야 할 역학은 어떤 걸까?’ 해서 구할 수 있는 책은 모두 구해서 모조리 다읽어 봤어요. 나라마다, 저자마다, 저작시기마다 관점이 다 달랐지만 그래도 배경을 깊이 파 보면 핵심은 거의 동일했어요. 대부분 먼저 쓰여진 저서를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덧붙이고 확장해 가면서 진화되어 갔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이 역학의 핵심 철학을, 우리보건문제를 중점으로, 또 그동안 현장에서 관찰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역학의 관점을 정리해서 한군데로 모으고 내 나름대로 역학은 이래야 되겠다 하고 개념을 다시 세운거에요. 사실 나도 새로 배운 거죠.<!-- Removed Tag Filtered (o:p) --> 

존스홉킨스에서 배운 역학은, 말하자면 국민 건강조사와 같은 2차 자료를 다운로드 받아다가 코딩해서 분석하는 그런거에요. 그것도 가설 설정에는 도움이 되지만 정확한 결론까지 얻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나는 그건 진짜 역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역학은 죽으나 사나 지역사회 현장에서 진실 (facts)을 색출해서 분석하여 결론을 찾는거에요. 사건 발생 현장에서 하는 거에요. 그게 진짜 역학이지요. 그래야만 정확한 사실을 파낼 수 있어요. 내가 현장에 직접 가서 수집한 자료도 true value에 얼마나 가까울까 하는 것이 나에겐 항상 걱정이거든요. 비록 내가 측정한 거라도말예요. 근데 남들이,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해온 것을 어떻게 그것만 믿고 결론을 낼 수 있어요? 이건 지나친 고집일까요? 이런 데이터로 우리나라 전체적인 대략적 모양을 한 번 보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진짜로 질병발생의 생태를 이해하고 역학적 장점을 살려서 그 특징을 파악하려면 현장에 직접 나가서 측정하고 인구집단 기초부터 분석해야 그게 진짜 역학이에요. 근데 요즘 우리나라 역학도 2차 자료만 가지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어서 염려스러워요. 유능한 역학자들을 게으르고 우둔하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미국은 field study (현장역학연구) 자료가 아니면 보건학 박사논문으로 인정 하지 않는데요."


-  우리나라에 보건대학원도 20개가 넘고, 역학을 교육하는 기관은 많아졌지만, 막상  field epidemiology (현장 역학)나 이런 쪽의 강의가 개설된 곳은 드뭅니다.<!-- Removed Tag Filtered (o:p) --> 

 “그래서 그게 걱정이에요. 가르치는 사람도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배운 게 지식이 되고 그런 지식이 있어야 남한테 전할 때도 진심으로 전해지지, 남이 한 거 앵무새처럼 전하기만 하면 학생들 뇌리에 각인되지도 못하고 객지식이 되기 쉽지요. 교육은, 특히 역학 교육은 그렇다고 생각해요.”<!--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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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학회의 설립과 초기활동”<!-- Removed Tag Filtered (o:p) --> 

-  교수님을 주축으로 한국역학회가 1979년 만들어지고 초대부터 3대까지 회장을 하셨습니다. 창립 당시 이야기와 초기 역학회 활동 좀 말씀해 주세요.<!-- Removed Tag Filtered (o:p) --> 

내가 64년에 미국에서 귀국해서 제주도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위한 연구를 약 1 10개월하고 미국 대학원에 돌아가 7개월간 자료분석, 논문을 끝내고, 남가주 의과대학 부속 연구소 (말레이시아 소재)에서 학위 후 연구관 6개월을 마치고 1967년 가을에 귀국하여 1968년부터 역학을 가르쳤어요. 권혁한 선생, 배길한선생 등이 서울대 보건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역학이 이렇게 중요한데 왜 역학회는 없습니까? 역학회를 만들어야 됩니다. 우리끼리라도 합시다.하는거에요. 그래서 역학회를 만들게 되었지요.<!-- Removed Tag Filtered (o:p) --> 

 내가 한국역학회를 만들고 젤 첨에 한 일은, ‘우선은 한국 역학의 학문적 수준을 알아야겠다.해서 역학을 가르치는 전국의 각 교육기관의 교수들을 모셔서 워크숍을 했어요. , 보건전문대, 간호대, 의과대학, 보건대학원에서는 무엇을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가르칠 것인가를 정하기 위해서 워크숍을 했죠. 그 전에는 대학마다 교수마다 가르치는 역학내용이 다 달랐어요. 그런데 세미나를 하려면 점심도 대접해야 되고 회의장도 임대해야 되고 해서 WHO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한국이 당시 각 교육 기관별로 역학 개념도 제대로 서있지 않고 내용도 뭘 가르쳐야 되는지도 모르고 해서 이걸 정리하기 위해 교수들 대상으로 워크숍을 해야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거기서 3,000불을 줬어요. 79년도에 3,000불이면 지금으로 치면 꽤 큰 돈이죠. 그때 내 전임강사 봉급이 3만원이었으니까요. 그때 의학교육연수원이 서울의대에 있어서 당시 의대 신동훈 학장께 도와 달라고 말씀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을 해주어서 세미나실을 이용할 수 있었어요. 세미나 실이 4-5개 있었는데, 전문대, 간호대, 의대, 대학원 교수들 그룹을 짜서 브레인 스토밍 (brain storming)을 해서 나온 의견을 종합해서 전체 토의에서 발표를 하고 토론을 해서우리나라 역학 교육내용을 정리해 나갔어요.

 그리고 또 초창기에 한 일이 있는데, 한국역학회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되는 질병이나 보건문제를 주제로 정해서 심포지엄을 했어요. 이사회에서 현재 제일 시급한 보건문제를 정하면 이를 주제로 매번 전문가를 초청해서 심포지엄을 대대적으로 하고 그 결과를 학회지에 실었어요. 정부가 그걸 보고 현재 우리나라 보건문제를 제대로 알고 해야 할 일들을 인지하게 하기 위해서 그랬죠. 정부에서 당장 뭔가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문제 의식이라도 갖게 하자는 목적이었어요.<!-- Removed Tag Filtered (o:p) --> 

<!-- Removed Tag Filtered (o:p) --> 예를 들면 에이즈도 한국에서 문제가 되기 전에 역학회에서 다뤘어요. 그런데 얼마나 그 때문에 홍역을 치렀는지 몰라요.한국과 같은 동방예의지국에 그런 더러운 병이 들어 오겠냐, 왜 괜히 사람들 공포에 떨게 하냐는 논조로 신문에서 비난을 했고, 의사협회에서도 '문제도 발생하기 전에 과잉으로 떠들어대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어요. 그런데 한 달도 안돼서 떡 하니 국내 감염자가 발생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게 중요해요. 옳다고 생각하면 남이 뭐라 해도 밀고 나가는 뚝심이 필요해요. 아마도 이런 사회로부터의 비난 건 때문에 더 선전이 잘돼서 우리나라에서는 에이즈가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는지도 몰라요. 그때 내가 의사협회지에 에이즈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이거 아마 몇 십 년 되기 전에 일반적인 성병으로 전락할 거다. 무서워할게 없다.그랬어요.  감염병이 처음에 사람에게 오면 독력이 강해서 치명률이 매우 높아 무서운 전염병이지만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기면서 자꾸 독력이 약한 병원체만 selection 되므로 치명률이 떨어지게 돼있어요. 그런데 진짜 지금은 거의 일반 성병처럼 다루고 있잖아요. 이 일이 터지고 나서 에이즈퇴치연맹 회장자리를 맡아 달라고 해서 그것도 했어요. 하하하”<!-- Removed Tag Filtered (o:p) --> 

- 지금 한국역학회는 참여 인원도 많고 우리나라 보건분야에서 제일 큰 학회가 되었는데, 교수님이 역학회 처음 만드실 때 이렇게 커질 걸 예상 하셨나요?<!-- Removed Tag Filtered (o:p) --> 

  “이렇게 커질거라 생각했다기 보다는 국민보건 향상에 중요한 학문이므로 어떻게 해서라도 키울 각오를 했었죠.” (편집자 주: 김정순 교수님이 직접 말씀을 안 하셨지만, 교수님은 은퇴 후에도 한국역학회의 발전을 위해서 1억 원을 희사해서 이 기금으로 매년 형우당 젊은역학자상을 수상하고 있으며, 본인의 역학원론 등 저서의 판권도 모두 한국역학회에 기증하여 여기서 나오는 수익은 모두 한국역학회로 들어오게 하는 등 계속 학회의 발전에 힘을 쏟고 계시다.)<!--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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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조사: 진실은 현장에 있다”<!-- Removed Tag Filtered (o:p) --> 

   - 교수님의 많은 업적이 있지만, 국내에서 최초로 밝힌 질병들은 지금 봐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렙토스피라증도 그렇고 레지오넬라증도 그렇고. 새로 원인을 찾는 것은, 이미 알려진 질병을 조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최초로 그런걸 찾기는 굉장히 어려운데무슨 비결이 있으시면 공개해 주세요.

     아주 운이 좋았어요. 근데 그런 걸 찾아 낼 수 있었던 것은 임상적인 자연사와 병력을 철저하게 정리를 해서 제대로 가설을 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에요. 실 레지오넬라 유행조사가 제일 어려웠어요. 경험도 안 해보고 흔한 질병도 아니고. 그리고 레지오넬라는 미국에서 임상 수련할 때도,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도 못 들어본 질병이에요. 그게 1976년에야 처음 알려졌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아침 강의 시작 이전에 모여서 하던 역학관련 journal review 에서 우연히 레지오넬라 논문이 걸려 들었어요. 그 이전에 물론 다른 학술지에서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때 처음으로 레지오넬라에 대한 것들을 자세히 봤죠. 1976년 미국의 한 도시의 향군 모임 때 집단 발병했고 이 원인균을 찾다가 흙이나 물에 살고 있는 세균인 레지오넬라를 새로 찾아냈어요. 우리가 이 질병에 대한 가설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기적 같은 행운이었어요. 우리가 하던 journal review에서, 한국 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에 American Journal of Epidemiology 에서 중요한 논문을 review 했던 거예요. 즉, 1968년 미시간주 폰티악 보건소에서 여름 철 더운 어느 날 냉방 system이 고장나서 수 시간 더위에 고생하던 전 보건소 직원과 방문객들에게 원인불명의 고열성 질환이 집단 발병했어요. 이를 Pontiac fever로 잠정 명명하고 이들의 혈액 등 환자 검체와 그 환경에 실험적으로 노출시켰던 기니피그를 냉동해서 보관해 두었다가, 1977년 레지오넬라균이 발견되었다는 보고에 따라 레지오넬라균 감염을 의심하여 보관했던 검체를 검사하니 Pontiac fever도 레지오넬라균이 원인이라고 밝혀졌죠. 이때까지 늙고 병든 노인에게 폐렴을 일으킨 산발적인 레지오넬라증과 열대지방 환경이 열악한 남미 등 여러 곳에서 여름에 지하수로 샤워한 젊은 사람들에서 독감 같은 증상으로 한, 두 환례가 드문드문 독립적인 case report로만 보고되어 왔었거든요. 아마 이 Pontiac fever에 대한 보고서를 못 읽었더라면 중환자실 의료진까지 고열병을 앓은 이 질병의 원인을 짐작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Removed Tag Filtered (o:p) --> 

<!-- Removed Tag Filtered (o:p) -->        1984 7월 여느 때와 같이 아침 7시 반쯤 출근했는데 갑자기 보건복지부에서 전화를 받았어요. 시내 모 종합병원에 10명 입원한 중환자실에서 갑자기 4명이 사망해서 그곳에 지인을 병문안 갔던 기자에 의해 신문에 보도되고 보건복지부가 역학조사를 시작해서 빨리 와 달라는 전화였어요. 그런데 현장에 가서 보니 중환자실 의료진들도 동일 기간에 원인 모를 고열성 질환에 걸려 있었어요. 처음에는 중환자실에서 단 시간에 4명이 죽는건 감염이기 보다는 산소 같은 가스류를 잘못줘서 그런거 아닌가 의심을 했거든요. 그래서 가스 공급하는 체계를 먼저 조사했는데 그건 아니더라구요. 그런데 현장을 보니 공사를 하느라 병원 외부와 내부가 흙먼지로 덮여 있었어요. 공사를 하느라고 병원 주위에 땅을 다 파놓고 열린 창문으로 흙먼지가 들어오는 거에요. 그런 환경 조사를 바탕으로 감염된 사람들과 사망자들 의무기록을 다 조사하고 정리하면서 이 질병의 자연사를 그려나갔죠. 감염된 여러 사람을 인터뷰 하고 나니 아 이건 레지오넬라구나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검사에서 확인이 되어서 우리나라 최초로 레지오넬라를 보고하게 된 거죠.”<!-- Removed Tag Filtered (o:p) --> 

 

 -  1988년 신안군 탄저 역학조사 때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많이 겪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헤쳐나가셨는지요?<!-- Removed Tag Filtered (o:p) --> 

 “ 신안군 탄저 발생은, 조사를 의뢰한 보건복지부 뿐만 아니라 몇몇 학자들까지도 탄저병이 아니라고 하면서 현지조사까지 방해 받은 어려운 사건이었어요. 그런 환경에서도 내 오가지가 쎈 덕에 한 거예요 (편집자주: ‘오가지는 표준국어사전에 없으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교수님 말씀 그대로 씀. 문맥상 강하고 지속적인 고집,‘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해나가는 뚝심의 의미로 해석됨). 당시 신안군 신도리라는 작은섬에서 수년간 모든 가축들이 거의 몰살하고 100여명 인구의 10%의 치명률을 낸 무서운 유행이었지요. 그래서 주민들의 조사와 함께 죽은 가축들 묻었던 곳, 동물들이 침 흘린 축사 등을 찾아다니면서 직접 호미로 파고 환경 검체를 채취했어요. 죽은 소를 묻었던 모래흙에서 탄저균이 분리 되었고 환자에게서도 한 주 분리 되었고. 그런데 우리나라가 참 이상해요. 탄저는 가축의 주요 감시 전염병인데 가축위생 연구소나 수의대 감염병 교수, 그리고 국립보건원 등 주무기관에서 아무도 탄저균 감염을 의심도 안했고 정성껏 채집해다 준 검체 배양에서도 탄저균 배양을 못하고 음성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검사하라고 줬던 검체 sample들을 도로 돌려달라고 해서 받아가지고 세균 배양 매뉴얼을 보면서 우리 역학 실험실에서 분리를 했어요. 이때 수의대 출신 조교였던 허용 선생이 노고를 많이 했어요.<!-- Removed Tag Filtered (o:p) --> 

 매뉴얼을 뒤적이면서 밤새서 우리 실험실에서 nutrient agar에 배양을 해서 봤더니 바실루스가 허옇게 자랐더라구요. 거기서 바실루스 안트락스 (<i style="mso-bidi-font-style: normal;">B. anthrax</i>)를 골라야 되는데, 이 균주의 콜로니 (colony)는 메두사 뱀 대가리처럼 삼각형으로 생겼으므로 이와 비슷한 배지 12개를 골라서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에다 보냈어요. 파스퇴르 연구소에서는 두 개가 탄저균이라고 해서 당시 보건복지부 국장에게 보고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고서를 보면서도 국장은 탄저균이 아니라는 거에요. 더구나 얼마 후 탄저균이라고 알려 온 검체를 달라고 하여 주었더니 미국의 CDC에도 보냈는데, 거기서도 탄저균이 아니라고 왔다는 거에요. 하도 이상해서 아니라고 보고한 원본을 보자고 했더니, 아닌긴 왜 아니예요. '이건 탄저균인데 와일드 (wild)형이 아니고 배지에서 배양된 백신 스트레인 (strain) 같다고 써 있고, 우리가 준 몇명의 환자 혈청도 양성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써있는거에요.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후에 국립보건원은 학자들을 모아놓고 심포지엄을 하면서 신도리에서 발생했던 원인 불명의 집단 발생은 탄저가 아니라 농약 중독이었다는 사실을 다수결로 결정짓는 회의를 하면서, 나를 여기에 참석시키려고 부산에 다른 역학조사 차 가있던 사람을 강제로 납치하듯 데려오지를 않나, 후속 역학조사를 하러 신안군 현지에 다시 갔더니 관과 짜고 경찰이 들여보내지를 않았고, 심지어 논문을 예방의학회지에 발표하는 데에도 입김을 넣고 했어요. 그래서 이 신안군 탄저 유행 조사가 가장 제 속을 썩였어요. 그런데 이뿐만 아니라 유행성 출혈열 역학조사도 그렇고 말 못할 일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번에 책을 낸 거에요.” (편집자 주: 김정순 교수님은 현지 역학조사의 체험과 못다한 이야기들을 2017한국인의 질병발생 및 관리양상과 보건문제라는 책으로 펴내셨다.)<!--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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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존 스노; 진실을 찾는 여정”<!--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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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역학조사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너무 재미있어서 끝도 없이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서, 역학 조사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한 두개만 더 말씀해 주세요.<!-- Removed Tag Filtered (o:p) -->  

 “우리나라는 유행이끝나 갈 무렵 쯤 역학자를 불러요. 그래서 이미 있는 데이터만 보면 짐작이 금방 갈 때도 있어요. 원주시 장티푸스 유행 때도 보건소에서 온 환자 명단을 딱 보니 연령별로 환자가고루 분포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이건 지역사회 공통 오염원이구나 하고 딱 알 수 있었지요. 그럼 공통오염원으로 올 수 있는게 음식 아니면 물의 오염일 수 밖에 없겠다 해서 가자마자 원주시 지적도를 복사해 달라고 했어요. 38명 환자의 주소와 동 별 인구수를 기록하고 2개 상수도 군별 보급 상황을 봤어요. 환자가 넓게 분포해 있었어요. 산골에 있기도 하더라구요. 이 건은 각 환자별로 방문 조사를 해서 환경을 조사하고 어느 상수도 보급을 쓰는지도 보고 뭘 먹었는지도 조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도청에다가 간호사 20명만 구해달라고 했어요. 그 자리에서 설문지를 만들어서 20명을 트레이닝 시킨 후 각 지역으로 조사를 보냈어요. 저녁에 다 들어 왔어요. 그리고 실제로 환자가 발생한 집은 내가 직접 갔어요.

 진실은 늘 현장에 있어요. 한 여자가 발병을 했는데 그 집 식구가 7-8명이 있는데 혼자만 발병을 했어요. 얘기를 들어 보니 그때가 음력 정월 설날이라 다른 식구들은 모두 큰 집에 가고 이 사람은 자연유산으로 출혈이 심해서 못갔데요. 그래서 '음식은 먹었냐' 했더니, 움직일 수도 없는데 아침결에 목이 너무 말라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실컷 마셨데요. 또 한 사람은 50대 남자인데 어떤 음식을 드셨어요 했더니, 그 사람 식사습관의 특징이 꼭 밥 먹기 전에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한 사발 먹는 거래요. 그래서 정월 초 하룻날도 그렇게 마셨다는 거에요. 여러 식구가 함께 사는데 이 사람만 걸린거예요. 또 애들이 많은 보육원에서 환자 보고가 없어 방문했더니 거기는 수도물 값이 아까워서 원래 있던 우물 물만 쓰고 있데요. 거기는 한 명도 환자가 없었어요. 그리고 수도가 못들어간 치악산골 마을에도 환자가 발생해서 가 봤더니 설날 시내 큰 집에 차례 지내러 가서 아침 식사를 했데요. 그러면 뻔 하잖아요. 상수 오염의 시간 범위까지도 예측이 가능 할 만큼요. 그래서 수도국에 가서 소독일지를 보자고 했더니, 수도국 사람이 당황은 하지만 염소 소독은 예전대로 제시간에 했다고 주장도 하고 기록에도 틀림이 없더라구요. 많은 경우에 초하루 날은 차례 지내러 가느라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넣어야 되는 염소 소독제를 안 넣을 수가 있어요. ‘그까짓 거 하루, 또는 몇 시간 늦게 넣었다고 설마 무슨 일 있을라고….’ 하는 거지만 바로 그게 문제가 되는 거지요.<!-- Removed Tag Filtered (o:p) --> 

<!-- Removed Tag Filtered (o:p) --> 이를 더 확인하기위해 취수원의 위치를 물어 취수원엘 갔더니 홍천서 내려오는 취수장이었는데 개천을 따라 사람들 산책길이 쭉 뻗어있더라고요. 그때 길에 아직 눈이 군데군데 있었는데, 세상에 거기 조사 차 걸어가는데 인분이 수두룩해서 갈수가 없었어요. '아이구.. 이건 별수 없이 물 오염이 여기서 되었겠구나' 했죠. 또 보통 구정에는 추워서 눈이 녹지를 않았을 텐데 싶어서 기상청에 날짜별 기온표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다른 때보다 구정 때 3-4도 더 높았더라구요. 그래서 결론을 내렸어요. 이건 다른걸로 설명이 안되요. 존스노가 콜레라 역학조사할 때도 펌프 물 안쓰고 우물을 쓰던 30-40명의공장 노동자들은 안 걸렸잖아요. 여기도 똑같았어요. 이건 상수도 오염이 틀림이 없죠. 아무리 아니라해도 철저히 찾으면 여러가지 사실들 (facts)들이 보석처럼 반짝반짝 줄줄이 본체를 나타내 주거든요. 그래서 역학이 참 재미있어요.”

- ​앞으로도 많은 후학들이 역학조사를 하게 될텐데, 역학조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하고 잊지 말아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Removed Tag Filtered (o:p) --> 

 “제일 중요한 건 바로 마음가짐과 태도에요. 다른건 없어요.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진실을 끝까지 찾는다.하는 그런 마음을 계속 가지고 목적을 달성했다는 확신이 있을 때까지 찾아야해요. 괜히 힘들다고 나 보다 더 많이 알 사람도 없을 텐데하는 오기로 대충 엮어서 보내자그런 마음이 생기면 그것은 거짓일 수도 있어서 무서운 자기 함정이 되요. 그렇게 하다 보면 과학자로서의 양심도 흐려져서 습관화되고, 한번 함정에 빠지면 못 나와요. 세상이 얼마나 매정하고 무섭다는 것을 알게되고 과학자로서의 pride, 인생의 가치도 무너져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명예욕에 끌려 책임감 없이 불성실한 연구 자료를 내서 한 번 실수하면 좋은 연구 자료 달라고 드나들던 기자들도 금방 등을 돌려 실력도 없는 사기성 학자라고 수군거리고 동료 학자들도 달갑지 않게 대하고상상만해도 지옥이잖아요? 그래서 난 지금도 천지신명과 주변 동료 과학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동안 내가 누린 행운이에요. 여러 경우에 함정이나 헛된 명예욕과 같은 유혹에 걸려 곤란에 빠지지 않고 일들을 무사히 해결 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정말 제일 고마운거에요. 실제 현지에 가서 사건을 당면하면 얼마나 두렵고 겁나는지 경험해 봐서 잘 알거예요. 역학하는 사람은 그만큼 책임이 무겁고, 견뎌내야 하는어려움이 있는거에요. 학문이라는 것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지만 여러가지 복잡한 요인들과 얽히고 꼬여서 보이지 않는 진리를 우리가 하나 하나씩 제거하고 걸러내면서 그 본체를 찾아 확인해 내는거거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역학을 배운 사람은, 정말로 바라건데 역학적 이론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것를 얽어 매서 엮는 함정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돼요. 그런일은 절대 없어야 해요.' 이것이 내가 역학자 동료 여러분들께 꼭 일러두고 싶은 말이고, 또 내가 누려왔던 것처럼 진리를 찾으러 가는데 마다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겠어요.”<!--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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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하는 사람은 당면한 국민 보건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Removed Tag Filtered (o:p) --> 

<!-- Removed Tag Filtered (o:p) --> -  교수님께서는 역학하는 사람들은 시대가 당면한 보건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고민해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 Removed Tag Filtered (o:p) --> 

그래야죠. 그래야 보람이 있잖아요. 남 다 해놓은 거 뒷북이나 치고 그러면 안되잖아요. 내가 왜 보건학을 하고 있나를 생각하면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죠. 그냥 먹고 살려고 보건학, 역학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내가 처음 역학회를 만들었던 때 했던 것처럼 지금도 역학회가 국내에 문제가 되는 보건 문제들을 잘 정리하고 문제화하고 이슈를 만들어서 정부를 자꾸 자극을 해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정부에서 이것을 해라 그럴 때까지 기다리면 벌써 늦어요. <!-- Removed Tag Filtered (o:p) --> 

 그리고 만약 내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이 자리가 다른 사람이 했다면 더 나을 수도 있었는데...이런 생각이 들면 물러나야 해요. 그럼 더 나은사람한테줘야지 내가 있으면 해를 끼치는 거잖아요. 결과적으로는. 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마음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확신해요. 조급해 할 것도 없고. ”<!--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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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학회의 설립과 발전이 정말 자랑스러워”<!--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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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은 역학자로서 굉장히 활발히 활동 하셨고, 많은 후배 양성도 하셨고 훌륭한 업적들이 너무 많으신데 그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을 꼽는다면요?<!-- Removed Tag Filtered (o:p) --> 

그래도 내가 마음 뿌듯한 것은, 사람들이 별로 관심도 없어 했던 우리 역학회를 누군가가 계속 구심점이 되어서 지금까지 잘 키워 나간거, 그거는 내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더구나 국가가 필요로하는 새로운 정책을 내고 직접 사업에 참여해서 국민보건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감동돼요.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학회가 수없이 많지만 역학회만큼 국가에 기여 하는 학회가 없어요. 이렇게 탱탱하게 성을 쌓고 국가적·사회적 기여를 잘 하고 있는 학회는 드물어요. 한국역학회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아주 잘 하고 있어요. 내가 기여한 것은 별로 없지만 역학회의 눈부신 발전에 큰 보람과 최대의 자랑을 실컷 누리고 있어요."

- 마지막으로 한국역학회에 바라는 점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Removed Tag Filtered (o:p) --> 

난 한국역학회가 조그만 규모의 학회치고는 아주 탄탄하게 그 동안 많은 일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내가 처음 꾸려 갈 때는 보건대학원이 중심이 돼서 수의사, 간호사, 의사 그룹들, 그리고 공학자, 수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등 여러 영역의 전문가들의 협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학회 창립 초기에는 여러 전문 그룹들이 활발히 참여했어요. 적어도 여러 보건의료 전문분야들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의과대학이 중심이 되다 보니 다른 영역의 사람들은 잘 오지를 않아요. 지금은 주요 활동 멤버가 의사들이 많은데, 난 그건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아요. 역학은 여러 영역의 학문이 어울려서 협동을 해야 된다고 봐요.<!-- Removed Tag Filtered (o:p) --> 

<!-- Removed Tag Filtered (o:p) --> 또한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에서는 의사들이 보건전문가 역할을 할 때 역학 부문에서 정말 꼭 필요한 것이 뭔가에 대해서 학회에서 review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지금 수행되고 있는 역학교육은 그 내용이나 수준면에서 얼마나 학생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는지, 개선할 점은 없는지 수시로 점검해서 계속 개선해 나가는 route를 설정하여 거기에 맞도록 reshaping 하면서 정말 한국이 필요로 하는 의사를 만들어 내는데 역학회가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 교수님,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오전 10시에 와서 오후 4시 넘어서까지 인터뷰를 했지만 아직도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1, 2부로 나눠서 한 번 더 해야 할까 봐요, 하하.  이 인터뷰를 통해서 교수님의 역학철학이 더 많은 사람에게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장시간 말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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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이 말은 아이작뉴튼이 로버트 후크에게 쓴 편지에서 인용된 후 학문의 세계에서 흔히 회자되는데, 뉴튼 자신의 학문적 성공이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앞서간 위대한 거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면에 미처 싣지 못했지만, 김정순 교수님은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은사로 당시 미생물학과의 기용숙 교수님을 꼽으셨다. 무엇이든지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서 학생들을 곤란에 빠뜨리셨던 기용숙 교수님으로부터 과학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과학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셨다고 하셨다. 우리가 현재 배우는 학문은 앞 선 여러 위대한 학자들이 쌓아 올린 탄탄한 성이다. 우리가 좀 더 멀리 볼 수 있고 좀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거인들이 키 작은 우리들을 어깨 위에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역학이라는 학문-특히 우리나라의 역학사에서 김정순 교수님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또 다른 거인이다. 그리고 키 작은 우리를 그 분의 어깨에 올려 놓아주셔서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서서훨씬 더 멀리 보고 더 넓게 보고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정순 교수님이라는 거인의 모습은 이 인터뷰 한 번으로 다 보여주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렇지만 후학들에게 우리나라에 이런 거인이 있고, 이로서 현재의 역학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김정순 교수님 인터뷰 내용 중 혹시라도 잔잔한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녹취하고 정리한 필자의 잘못일 것이다. <!-- Removed Tag Filtered (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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